강직· 우직한 뚝심으로 간언(諫言)하는 선비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하륜(河崙, 1347~1416)은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유학자였다. 또한 피를 부르며 군주의 자리에 오른 태종(太宗)이 조선왕조의 기틀을 세운 실질적인 창업군주가 될 수 있도록 보좌한 책사요, 명재상이다. 본관은 진주, 자는 대림(大臨), 호는 호정(浩亭),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하륜은 순흥부사 하윤린(河允麟)과 증찬성사 강승유(姜承裕)의 딸 강씨 부인 사이에서 고려 충목왕 3년(1347)에 진주에서 태어났다. 경전류에 해당하는 경부(經部), 역사서를 묶은 사부(史部), 학자들의 사상을 담은 자부(子部), 문학작품을 엮어놓은 집부(集部) 등 ‘경사자집(經史子集)’을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음양·의약·지리 등에 있어서도 모두 극히 정밀하였다.


1365년(공민왕14) 하륜은 19세의 나이로 과거시험 문과에 급제했다. 이때의 시험관이 거유 이색(李穡)과 이인복(李仁復)이었다는 점은 하륜에게 큰 행운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보수파에 맞서 떠오른 개혁파 사대부 그룹이 신진사대부이다. 이 중에서 정도전으로 대표되는 ‘급진파’는 조선왕조 창업을 주도했고, 정몽주로 대표되는 ‘온건파’는 고려왕조 간판을 유지하고자 했다.
양쪽의 운명은 1392년 조선 건국과 함께 엇갈린다. 건국 이후 6년간은 급진파가 권력을 잡았지만,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온건파가 되살아났다. 온건파는 태종 이방원(李芳遠) 정권의 핵심 세력으로 급부상했다. 바로 이 온건파 신진사대부의 일원으로서 이방원의 책사가 된 인물이 하륜이다.

≪태종실록≫의 서언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제(하륜)가 관상을 많이 봤지만, 공(민제)의 둘째 사위분과 같은 사람은 없었소. 제가 뵙고자 하니 공이 그 뜻을 전해주십시오.”

이렇게 해서 36세 하륜과 16세 이방원의 만남이 성사됐다. 스무 살 차이의 두 사람은 이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서로 자신의 평생동지가 될 인물임을 알아보았다. 하륜은 이방원에게서 조선의 기틀을 세울 왕재(王才)를 봤다.

하륜은 강직하고 우직한 뚝심이 있었다. 간언(諫言)을 해야 할 때에는 곧잘 간언하는 선비였다. 그 결과 하륜은 고려 조정에서 세 번이나 쫓겨났다. 첫 번째는 감찰규정(監察糾正) 때 당대의 집권자 신돈(辛旽)의 문객 양전부사(量田副使)의 비행을 탄핵하다 신돈에게 미움을 받아서 하루아침에 파직되었다. 두 번째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 시절 최영(崔瑩)의 요동정벌을 반대하다 양주로 귀양 갔다. 세 번째는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 직후에 이색 계열로 몰려 유배를 당하게 되었다.

하륜은 우왕(禑王)과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의 폐립에 간여하지 않았다. 하륜이 반대한 신돈·최영·이성
계는 하나같이 신하로서 왕권을 넘어선 자들이었다. 하륜은 온건 개혁노선을 견지했으며, 급진적인 개혁이나 정책에 대해서는 어김없이 반기를 들었고 그 시련을 묵묵히 감수했다.

조선의 3대왕 태종(太宗, 재위:1400〜1418)은 아버지 이성계를 보필해 조선왕조 개창에 공헌하였다. 개국 초에는 한때 불우하기도 했지만, 하륜의 전략인 안산군수 이숙번(李叔蕃)의 거사로 정도전 일파를 제거(제1차 왕자의 난, 1398년)하고 국권을 장악하였다.

1400년 11월. 정도전을 제거한 2년 후, 하륜은 정종(定宗)의 양위를 이끌어내 이방원을 조선 3대 국왕 태종으로 등극시켰다. 이때 하륜의 나이 55세였다. 정종 때는 정사공신(定社功臣)에 올랐고, 태종 때는 좌명공신(佐命功臣) 1등에 올랐다. 정사공신은 ‘제1차 왕자의 난’ 때의 공으로, 좌명공신은 ‘방간(芳幹)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책봉된 것이다.

하륜은 《태조실록》을 편찬하였고, 권근과 함께 역사서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는 여말선초에 유행한 도참사상(圖讖思想)의 ‘3대 대가(권중화·무학대사·하륜)’로 거명될 정도로 천문지리와 음양오행의 이론에 밝았다.

태조 이성계는 계룡산으로 천도를 결심했다. 그러나 경기 좌·우도 도관찰사(京畿左右道都觀察使) 하륜은 계룡산의 형세를 비운이 닥쳐올 흉한 땅이라고 주장하여 천도계획을 중지시켰다. 속설에 따르면 하륜은 두 번이나 태종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태조의 살수(殺手)를 막아냈다고 한다. 하륜의 예지력이 그만큼 뛰어났다는 증거이다.

하륜은 탁월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명나라가 조선이 올린 표문(表文)에 무례한 내용이 있다면서 그 책임자로 정도전을 지목해 소환을 요구했다. 이에 한성부윤 하륜은 계품사(計稟使)가 되어 정도전을 대신해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의 오해를 푼 외교력을 발휘하였다.

1416년(태종16) 11월 6일. 하륜은 함경남도 정평(定平) 땅에서 노구를 이끌고 제왕들의 능침을 돌아보다가 향연 70세로 순직하고 말았다. 태종은 하륜을 자신의 ‘장자방(張子房)’이라 했으며, 후대에 하륜은 한의 장량(張良), 송의 한기(韓琦), 당의 분양(汾陽, 곽자의)에 흔히 비유되었다.

하륜은 학문이나 정치력 등 모든 면에서 정도전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정도전이 조선왕조 창업의 밑그림을 그렸다면, 하륜은 왕권강화의 초석을 닦은 인물이다. 정도전은 신권(재상)중심의 통치를 이상으로 여겼지만, 하륜은 왕권 강화에 힘써 태종의 개혁정치에 앞장섰다. 하륜이 행정가적 학자라면 정도전은 혁명가적 학자였으며, 각각 이방원과 이성계의 ‘킹메이커’였다.

조선의 근간이 된 통치체제·신분제도·인재선발제도·사회운영제도 등은 모두 하륜의 손을 거쳤다. 조선은 왕권과 신권이 서로 견제하며 균형을 이루는 나라로 발전했다. 정도전이 설계한 ‘신권 우위’의 질서와 하륜이 추구한 ‘왕권 중심’의 질서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27대 518년간 이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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